입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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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입도조 한천의 행적

청주한씨세보 권상에 나오는 내용을 해석

서재공 휘 천 유허비

청주한씨 제주에 뿌리내린 한천의 후예

서재공 한천 입도조 묘를 찾아서

한천의 시주로 제작한 보물 제705호

 

 

m04.png 청주한씨 제주에 뿌리내린 한천의 후예

sub2_12.jpg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고요한 마을, 이곳에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 선조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오늘날 한천의 후손들은 그가 남긴 길 위에서 조용히 그의 유산을 지켜나가고 있다. 14세기 말,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을 섬기던 대제학 한천은 고려 왕조를 지키려는 충정으로 나라를 떠받치던 학자였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하자 그가 지키던 왕조는 급진 개혁파에 의해 무너졌고, 한천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던 신료들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의 삶은 한순간에 굴곡을 맞이했으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충의를 굽히지 않았다.

 

유배가 풀리고 나서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청주한씨 문중의 종손으로서 고려를 지켜야 할 사람이었던 그는 제주 땅에 깊이 뿌리내리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한천은 바다 건너 먼 제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낯선 땅에서 청주한씨의 첫 발자국을 새기게 된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천은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개성에서 출발하여 정읍, 해남을 거쳐 해로로 제주 성산포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는 한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정착지를 찾던 끝에 마침내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가시리 마을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청주한씨 제주 가문의 기원이 된 장소다.가시리의 정착한 한천이 처음 살았던 집터에 세운 사당인 충의사(忠義祠)는 서재공의 지조와 정신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것이었다. 이곳에는 한천의 업적을 새긴 유허비가 세워져 있으며, 많은 후손이 제를 올리며 그의 덕을 기린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들조차도 그가 남긴 묘소를 잊고 말았다. 유허비와 사당은 그대로 남았지만, 정작 선조의 묘를 찾아 그를 모시려는 후손들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묘를 찾지 못한 후손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당을 돌보고 가꾸며 선조의 흔적을 지키려 했다.그러던 중, 1953년 이웃 성산읍 신산리에 살던 한 석공 고재관 씨에게 이상한 꿈이 찾아왔다. 꿈속에서 한천의 영혼이 나타나 “나는 청주한씨의 선조이다. 내 집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길 바란다”라고 말하며 묘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다. 그 꿈은 3일 밤을 연이어 이어졌고, 고재관 씨는 결국 이 꿈을 한씨 문중에 전했다. 문중 후손들은 이 소식을 듣고 꿈에서 나타난 표식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가시리 서쪽 소을악 산기슭을 따라 나아갔고, 마침내 소을악 남쪽에 묘와 그가 남긴 표식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순간 후손들은 한천의 묘소를 되찾았다는 기쁨으로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선조의 묘를 다시 찾은 후손들은 이 묘를 철저히 보존하며 청주한씨 가문의 뿌리를 제주에서 이어가게 되었다. 특히 한천의 발자취를 되짚어볼 수 있는 가시리 곳곳의 지명들은 선조가 제주에서 남긴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큰뒷밭, 작은뒷밭, 안위연, 동백남밭, 외밭, 서당팟, 절구터, 사장터, 중위왓 등 마을 곳곳에는 한천이 제주민들과 함께 살며 남긴 흔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한천의 덕망과 학문을 익히기 위해 제주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시리로 모여들었고, 그는 제주 사람들에게 학문을 전파하고 예의를 가르쳤다.한천 선조는 평생을 학문과 교화에 헌신했지만, 자손들에게는 벼슬길에 오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상의 권세보다는 충의와 겸손을 잃지 말라는 그의 가르침은 후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손들은 제주에서 청주한씨 가문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후손들은 그가 남긴 “세상을 피해 살고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며, 제주 땅에서 선조의 정신을 이어가려 했다.

 

오늘날, 제주 서귀포 표선면 가시리의 충의사는 한천 선조의 굳건한 충의와 유산을 상징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이 사당은 한천이 걸어온 길과 청주한씨 가문의 뿌리를 상기시키며, 후손들이 그의 뜻을 잇기 위해 지금도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을 비롯한 해외 등 곳곳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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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입도조 한천의 행적

 

청주한씨세보 권상에 나오는 내용을 해석

서재공 휘 천 유허비

 

청주한씨 제주에 뿌리내린 한천의 후예

서재공 한천 입도조 묘를 찾아서

한천의 시주로 제작한 보물 제705호

 

 

m04.png 청주한씨 제주에 뿌리내린 한천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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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고요한 마을, 이곳에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 선조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오늘날 한천의 후손들은 그가 남긴 길 위에서 조용히 그의 유산을 지켜나가고 있다. 14세기 말,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을 섬기던 대제학 한천은 고려 왕조를 지키려는 충정으로 나라를 떠받치던 학자였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하자 그가 지키던 왕조는 급진 개혁파에 의해 무너졌고, 한천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던 신료들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의 삶은 한순간에 굴곡을 맞이했으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충의를 굽히지 않았다.

 

유배가 풀리고 나서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청주한씨 문중의 종손으로서 고려를 지켜야 할 사람이었던 그는 제주 땅에 깊이 뿌리내리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한천은 바다 건너 먼 제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낯선 땅에서 청주한씨의 첫 발자국을 새기게 된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천은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개성에서 출발하여 정읍, 해남을 거쳐 해로로 제주 성산포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는 한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정착지를 찾던 끝에 마침내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가시리 마을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청주한씨 제주 가문의 기원이 된 장소다.가시리의 정착한 한천이 처음 살았던 집터에 세운 사당인 충의사(忠義祠)는 서재공의 지조와 정신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것이었다. 이곳에는 한천의 업적을 새긴 유허비가 세워져 있으며, 많은 후손이 제를 올리며 그의 덕을 기린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들조차도 그가 남긴 묘소를 잊고 말았다. 유허비와 사당은 그대로 남았지만, 정작 선조의 묘를 찾아 그를 모시려는 후손들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묘를 찾지 못한 후손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당을 돌보고 가꾸며 선조의 흔적을 지키려 했다.그러던 중, 1953년 이웃 성산읍 신산리에 살던 한 석공 고재관 씨에게 이상한 꿈이 찾아왔다. 꿈속에서 한천의 영혼이 나타나 “나는 청주한씨의 선조이다. 내 집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길 바란다”라고 말하며 묘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다. 그 꿈은 3일 밤을 연이어 이어졌고, 고재관 씨는 결국 이 꿈을 한씨 문중에 전했다. 문중 후손들은 이 소식을 듣고 꿈에서 나타난 표식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가시리 서쪽 소을악 산기슭을 따라 나아갔고, 마침내 소을악 남쪽에 묘와 그가 남긴 표식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순간 후손들은 한천의 묘소를 되찾았다는 기쁨으로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선조의 묘를 다시 찾은 후손들은 이 묘를 철저히 보존하며 청주한씨 가문의 뿌리를 제주에서 이어가게 되었다. 특히 한천의 발자취를 되짚어볼 수 있는 가시리 곳곳의 지명들은 선조가 제주에서 남긴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큰뒷밭, 작은뒷밭, 안위연, 동백남밭, 외밭, 서당팟, 절구터, 사장터, 중위왓 등 마을 곳곳에는 한천이 제주민들과 함께 살며 남긴 흔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한천의 덕망과 학문을 익히기 위해 제주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시리로 모여들었고, 그는 제주 사람들에게 학문을 전파하고 예의를 가르쳤다.한천 선조는 평생을 학문과 교화에 헌신했지만, 자손들에게는 벼슬길에 오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상의 권세보다는 충의와 겸손을 잃지 말라는 그의 가르침은 후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손들은 제주에서 청주한씨 가문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후손들은 그가 남긴 “세상을 피해 살고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며, 제주 땅에서 선조의 정신을 이어가려 했다.

 

오늘날, 제주 서귀포 표선면 가시리의 충의사는 한천 선조의 굳건한 충의와 유산을 상징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이 사당은 한천이 걸어온 길과 청주한씨 가문의 뿌리를 상기시키며, 후손들이 그의 뜻을 잇기 위해 지금도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을 비롯한 해외 등 곳곳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